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유럽 혁명 (문단 편집) === [[헝가리 인민 공화국]] ===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static.origos.hu/20131022-nagy-imre-nehai-miniszterelnok-es.jpg|width=100%]]}}}|| || {{{#000,#fff 사망 31년 만에 공식적으로 치러진 [[너지 임레]]의 국장. 멀레테르 팔(Maléter Pál)을 포함하여 헝가리 혁명 직후 소련에 의해 처형당한 너지 임레의 측근 4명의 장례식도 같이 열렸다. [[부다페스트]], 1989년 6월 16일}}} || [[1956년 헝가리 혁명]]이 소련군의 무자비한 무력 진압으로 실패한 후 [[서기장]] 자리에 오른 [[카다르 야노시]](Kádár János)는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다가 [[소련]]에 처형당한 [[너지 임레]]의 최후를 교훈삼아 [[바르샤바 조약 기구]]에 계속 잔류하면서도 경제적인 면에서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하는 점진적인 개혁안을 채택했다. 이후 30여년 동안 [[구야시]] 공산주의라는 헝가리만의 독특한 공산주의 체제가 유지되어 왔다. 그 영향으로 헝가리는 1980년대 들어서서 경제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자유화를 점진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. 카다르의 사망 몇 개월 전인 [[1989년]] [[1월 12일]] 헝가리 의회는 집회, 결사의 자유와 자유로운 상업 행위를 보장하고 개정된 선거안을 통과시켰으며 2주 후인 [[1월 29일]]에는 그동안 폭동으로 치부되었던 [[1956년 헝가리 혁명]]을 민중 봉기로 재규정했다. 이에 따라 새로운 시민 및 비 공산계열 준정당들이 결성되기 시작했으며 헝가리의 집권 여당인 [[청년민주동맹]](Fidesz)도 [[오르반 빅토르]]를 위시한 시민 운동가들에 의해 이때 창당되었다. [[5월 2일]]부터 헝가리는 자국과 [[오스트리아]] 간 국경에 쳐져 있던 철조망을 철거하기 시작해 실질적인 국경 개방을 단행했는데 [[동독]]인들의 [[서독]]으로의 탈출을 사실상 묵인하여 [[동독]] 정권을 붕괴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. [[6월 16일]]에는 31년 만에 너지 임레가 복권되어 [[부다페스트]]에서 국장 및 이장식이 열리면서 헝가리 혁명이 폭동이 아닌 혁명이라는 것이 의회 차원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공식 인정되었다. [[9월 18일]] 열린 원탁 회의에서 헌법 재판소 설치 및 다당제에 기반한 총선 실시가 합의되었으며 [[10월 7일]] 헝가리 사회노동자당이 당명을 헝가리 사회당으로 개명했다. 이듬해인 [[1990년]] [[3월 24일]] 총선 및 대선이 동시에 치러지고 [[헝가리 인민 공화국]]이라는 국명도 헝가리 공화국으로 개명되어 헝가리에서 [[공산주의]] 체제는 완전히 소멸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